에반게리온 : Q (2013)
Evangelion: 3.0 You Can (Not) Redo





- 감독
- 안노 히데아키, 마사유키, 마에다 마사히로, 츠루마키 카즈야
- 출연
- 오가타 메구미, 하야시바라 메구미, 미야무라 유코, 사카모토 마아야, 미츠이시 코토노
- 정보
- 애니메이션, SF, 액션 | 일본 | 96 분 | 2013-04-25





그동안 봤던 에반게리온 TV판이나 극장판을 통틀어 가장 재밌었다
'파(2.00 You can (not) advance)' 극장판이 영화의 형식에서 극한의 신기함과 몰입을 보여줬다면(시퀀스 구도나 호흡같은거 말고 CG와 박진감)
이번 Q(3.33 you can (not) redo) 에서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한 느낌
최근에 유행하는 미디어 매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별로 환영하진 않겠지만
나로써는 더 할 나위 없었다
1. 신지의 시점과 자괴감
영화의 시작은 신지의 눈뜸과 함께 진행된다
14년이 지났다고 중간에 언급되는데, 신지가 화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신지와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영화를 접한다
파가 끝난 뒤의 세계, 아스카는 눈 한짝 잃어버렸고 사람들도 다 바뀌어있고 이것저것 궁금하다
신지는 병신같은 소리를 자꾸만 지껄이고 사람들은 그걸 어이없어하거나 화를 낸다
그런데 우리는 파일럿들이 신지를 병신 취급할때 신지에 공감하면서 파일럿들에도 마음을 같이한다
시청자A는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가 궁금한 신지 이면서 그 신지를 짜증난다고 느끼는 파일럿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에반게리온의 주요 테마였던 오타쿠에 대한 경종의 가장 격렬한 형태의 구체화라고 느껴진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고 있다. 그러나 신지만 자신이 할 일이 없다.
신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도 저들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나도 초호기에 탈 수 있지 않을까?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채로 진행되는 인생
그것이 신지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떼를 쓰는 신지의 모습은 갑갑함을 유발한다
2.바보에서 꼬맹이(각키)가 된 신지
기존 작품들의 신지와 타인들의 대립각은 이랬다
신지는 아무것도 안하려고 한다 <-> (주로 미사토나 아스카를 비롯한 여성성)타인들은 행동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에바에 타느냐 타지 않느냐, 나는 에바에 타기 싫어요가 주가 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주 이슈는 신지가 뭔가를 함으로써 일어난다
신지는 자꾸만 뭔가를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떼를 쓴다. 주변인을 화나게 만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신과 상관 없다고 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건 마찬가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보'에서 모르는데 떼를 쓰는 '꼬맹이'가 된 것이다.
물론 기존의 지식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보다는 추구하는 쪽이 더욱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파국은
신지가 어떤것에 대해 자꾸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미사토에 반항해 레이에게 갈때 한번 그랬고, 카오루와 아스카를 거부하며 창을 뽑을때 그랬다(전편 마지막에서 레이를 구하려 할때도).
그렇기에 바보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옳은지, 자꾸만 애새끼처럼 떼를 쓰고 추구하는 것이 옳은지 가치 판단은 불가능하다.
단지 역사에 if는 없고, 파국이 왔다는 사실만이 있을 뿐.
3. 꼬맹이는 왜 파국을 불러일으켰는가?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자기가 세상을 망쳐놨다는데 죄책감을 안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속죄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가만히 있기 힘들다.
여기서 두 가지의,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성격적 결함이라고 말했을 것이 드러난다.
a, 인내(즉, 아무것도 안하는)의 능동성을 알지 못한다.
b, 목표를 성찰하지 않은 채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미사토는 신지에게 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카오루도 창을 뽑지 말자고 회의한다.
그러나 신지는 상황이 너무나도 궁금했고, 속죄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영화의 부제처럼 'undo'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필요했던 것은 발발 싸돌아다니는 강아지가 아니라 인내를 깨달은 어른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격렬한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목표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신지는 상황을 잘 모른 채 '이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라는 몇몇 순진한 목표를 설정한다.
떼를 쓰던, 고집을 부리던 어쨌든 나름의 '노력'을 통해 목표에 다다른다.
그러나 목표의 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다면 그 과정에 어떤 노력이 있던 그것은 오히려 역 효과를 불러온다.
물론 선택의 순간이란것이 있음은 맞다. 영호기가 신지를 데리러 왔을 때의 선택은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창의 회수라는 것에 대해 카오루에게 더 물어봤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카오루가 해주는 몇몇 단어로만 자신의 행동을 결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철저하지 못함은 자신의 과거를 거부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4. 그러나, 정말 몰랐다.
신지는 자신이 써드 임팩트를 일으켰음을 거부한다. 이는 딱 보기에 굉장히 추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라고 해도, 신지는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신지에게 도덕적 비난이 가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뒤에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정말 무의식 상태에서 벌어졌다면 그것은 현실감이 없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사회체제를 위한 법적 제재와 도덕적 비난은 다른 층위라고 보는 것이다.
카오루가 말한 너에겐 (현실이)아니어도 타인들에겐 현실이라는 말처럼.
그렇기에 당위성이라는 것은 과거던 미래던 현재던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끊임없이 탐색하는데에서 불러일으킬수밖에 없다.
이 당위성이라는 것은 사실들의 집약 정보를 최대한 많이 캐내는 것일 것이다.
신지는 자신이 레이를 구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짜증이 난다. 병신같은 선택이다. 왜냐하면 레이는 복제인간이니까.
하지만 이 또한 신지로써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양 측의 가치판단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시청자의 입장이 아니라 주인공의 입장이 되면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신지와 같은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라고는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는것, 목적의 유무를 떠나 가장 큰 베이스를 건설하는것 뿐이다.
그 이후에야,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그나마 보다 더 튼튼한 목표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누가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13호기의 동작이 중간에 멈췄다는 말이 빌레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정확한 경위는 모르지만 그들은 날아가고 있고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정보를 수집하는 것 뿐,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꼬맹이마냥 사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단지 좀 더 어른스럽게 인내하면서 갈구하는 것.
신지나 얘들이 '선택받은' '운명에 엮인' 뭐 이런 느낌의 대사들이 나오는데
사실 이거 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입장이다
존나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떠한 경위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선택됨에 의해
의식을 가지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애매모호한 개념인 '나'밖에 없으니깐.
어쨌든 이거 존나 재밌었다.
카오루와 신지가 함께하는 씬이 너무 길다고 뭐하는 서비스 컷이냐고 불평하는 글을 봤었는데
이건 너무 호모포빅한 생각이고
내가 보기엔 굉장히 자연스럽고 있을 법한 씬이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았다.
내용도 너무 친절히 설명이 나오고 기존의 이야기들을 묶어주는 편이라 불평이 나오기 힘들다.
아, 난 제레가 독일어 'Seele'인지 여기서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