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론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평범한 사람들의 자아 정체성이 현 상태보단 보다 강하게 형성되어야한다고 본다. 물론 국개론을 비롯해 국민의 수준낮음을 비난하는 부분은 정치학부터 사회학을 넘어 경제학에까지 깊게 배어있는 부분이지만(고전 경제학자부터 현재까지) 그것을 좀 다른 관점에서 짚어보자는 것이다.

일단 경제학에서는 개인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이 데카르트스러운 원자적 개인은 인권, 법적 자연인 개념과 함께 너무나도 뿌리깊게 박혀있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적 입장과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과연 사람이 원자적일수있는가?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이라는 것은 상상 속의 가정에만 존재하지 현실태로 나타날 수가 없다. 나는 히키코모리의 반례를 듣고싶은 것이 아니다. 히키코모리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든 게임 속에서든 즐기려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뜨겁다이든 슬프다이든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사회의 존재와 개인과의 교류가 상정된다. 

말이 좀 돌았는데, 요점은 이거다. 언어를 비롯해 모든 개념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 형성된다는 점.
미시경제학에서 주구장창 하는 말이,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라는 점이다. 가격이 정해지지 않은 A와 B중 더 좋은 것을 골라야 한다고 경제학은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개인의 선호인지 나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행태적으로 가격을 본 후 물건을 보곤 한다. 또는 물건을 보더라도 가격을 염두에 둔다. 
사람들은 몇몇 확고한 관심을 가진 취미분야를 빼고는, 애초에 자신이 선호하는 정도와 해당 물품에 대한 가치평가를 할 능력조차 없다! 그렇기에 대충 정보가 집약되어 있는 가격을 참조하게 된다! 
혹자는 이것이 편의에 의한 휴리스틱적 이점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럼 그것은 편의 경제학이지 선택과 선호에 관련된 경제학이 아니게 된다.

만약 경품으로 물건A를 준다고 하자. 그럼 보통 우리는 그 물건A의 필요도를 따지는가, 가격을 따지는가?
자본의 자기증식경향때문인진 모르겠는데 우리는 거기에 물품에 대한 선호가 없다.
물론 물건을 팔아 더욱 자신이 사고싶은 것을 사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품의 불태환과 불교환을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실지 얼마정도 하는 제품인지 고려하고 말것이다. 

오호 통재라 사람들에겐 선호도라 부를 만한 자기 정체성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어 돈이라는 고정적으로 보이는 가치에 안착하려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의 가변성(심지어는 위험성!)을 설명해주면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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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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