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인들은 신(神)을 믿었을까?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흔히, 유교적 제례를 쓸데 없는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 경우에 가치판단을 하겠다는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예전 사람들은 얼마나 미개했길래 죽은 조상에게 싹싹 빌며 소원 들어달라고 했냐고 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볼수록, 옛 사람들이 그리 멍청하진 않다. 과연 그들은 정말 멍청했을까?


다음은 모두 풍우란의 중국철학사(上)에서 발췌했다.


근대에 산타야냐(1863-1952)는 종교 역시 미신과 독단을 버리고 시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자]와 [예기]에서 옹호한 상례, 제례에 관한 해석과 이론을 보면, [순자]와 [예기]는 그보다 훨씬 전에 고대의 종교를 시로 수정했다. -p549

 풍우란의 간략한 설명이다. 종교가 미신을 버리고 시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은, 시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배설)를 유발하는 용도로써의 '기능적 도구'로 사용했듯 종교 또한 실용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꼭 같은 의미는 아니겠지만, 감정을 유발하는 문학적 효용이라고 좀 더 큰 의미로 보더라도 미신과 대립되는 실용성은 여전하다.



공자는 명기를 처음 만든 사람을 일컬어 "상도를 깨달은 분이다! 기물은 갖추되 쓸 수는 없게 했다"고 말했다. (예기 3권 5쪽)

 풍우란의 인용을 재인용. 상례/제례는 형식만 갖추면 되는 것이기에 실제로 쓸 수 있는것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공자는 이미 귀신을 믿지 않았고, 유가(儒家)는 굉장히 이해타산을 따지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명기란 제사나 뭐 그런걸 지낼 때 쓰는 기물의 모양을 갖춘 식기들인데, 조악하게 만들어서 실제 쓸 수는 없다. 어차피 실제 쓰지도 않는 것(神이 실제로는 없으니까)이니, 값싸게 만들어서 실리를 챙기니 좋다는 공자의 말이다. 


제사란, 추모의 정이요, 참마음과 믿음과 사랑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예절과 격식의 성대함이다. 진정 성인이 아니면 아무도 제사의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없다. 제사에 대해서 성인은 그 의미를 명백히 알고, 사군자는 편안히 행하고, 관리는 그대로 시행하고, 백성은 풍속을 이룬다. 제사는 인간의 도리(人道)로 여기고, 백성은 귀신의 일(鬼事)로 여긴다. -예기, 제통

성인은 제사가 인간의 일임을 아는데, 백성만 귀신의 일인줄 안다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 이유도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오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그것을 구제하는 의식을 행하고, 날씨가 기울면 기우제를 지내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친 후에 대사를 결단하는데, 이 모두는 무슨 효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형식(격식)을 갖추는 것을 뿐이다. 즉 군자는 형식의 일(문)로 여기고, 백성은 신령의 일[신]로 여긴다. 형식의 일로 여기면 길하지만 신령의 일로 여기면 흉하다. -순자 11권 33쪽

여기부턴 귀신이 없다고 믿었다면 왜 제사를 했느냐에 대한 답이다.


상례와 제례는 그로써 인애를 가르치는 것이다. 인애를 다하기 때문에 상례와 제례에 치성을 드려,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하여 추모의 정성을 바치는 것이다. 무릇 제사란 음식을 봉양하는 도리를 바치는 것이다. 돌아가셨어도 추모하여 음식을 봉양하거늘 하물며 살아 생존해계실 때야? 따라서 상례와 제례가 밝혀지만 인민은 효성스러워진다고 하셨다. -p562

위와 같은 '실질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교의 제례는 이미 미신이 아니라 시였다! (적어도 백성말고 성인에게는)

보면 볼수록 옛 사람들이 멍청하질 않다...


Posted by 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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